공감의 근원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공감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정신 치료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간이 가족 관계 또는 타인과 관계 속에서 일생 사는 동안에 공감적인 삶은 대단히 중요하다. 공감은 감정 지능(EQ)의 가장 중요한 핵심 개념이다.
그런데, 공감의 뿌리, 근원은 무엇인가? 공감 능력은 어디에서부터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 그 origin을 알아보고자 한다.
공감할 수 있으려면 우선 느낌을 느낄 수 있어야 가능하다.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은 표현도 안 되고, 자신의 느낌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줄도 모른다. 더욱이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모르기 때문에 (감정적 음치 tone-deaf), 공감 능력이 안 되어서 감정표현 불능증(Alexithymia)이 된다. 느낄 수 있고 느낌에 솔직하면 느낌을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공감 능력의 근원은 감정의 근원, 느낌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공감의 뿌리는 느낌이고 느낌의 시작은 아기가 태어난 직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갓 태어난 아기를 보려고 산부인과에서 출산 3일 만에 조리원으로 퇴원한 산모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산후조리원에 들어서자마자 아기가 큰소리로 ‘으아 으아’ 울고 있었다. 아기에게 엎드려서 얼굴을 바짝 대고 ‘아가 많이 울었어? 배고픈가? 우유 먹을까? 그래, 그래, 맘마 먹자’ 부드럽게 다정하게 달래주자, 그렇게 요란하게 큰 소리로 울던 아기가 울음을 뚝 그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 보는 것이었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데 놀랐다. 느낄 줄 알았다. 느낌이 살아 있었다. 태어나서 3일 된 아기가 느낄 줄 아는 것이다. 아기는 느낌이 좋았던 것이다.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느낌으로는 자기한테 우호적인 사람이라는 것, 사랑스러운 말을 하는 사람이고,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 같다는 것을 느낌으로 안 것이다. 아직 뭔지 모르는, 태어나서 3일 된 아기지만 느낌으로 안다는 것을 눈앞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진심으로 위로하는 말에 아기는 좋은 느낌을 느낀 것이다.
또 다른 예로, 9개월 된 아기가 옆에 친구가 넘어지는 것을 보더니 순간적으로 마치 자기가 다친 것처럼 울음을 터트리면서 엄마를 향해 기어갔다. 또 15개월 된 어떤 아기는 친구가 큰 소리로 우니까 자기의 곰 인형을 들고 와서 주려고 했다. 그래도 계속 우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항상 손에 쥐고 있던 작은 담요를 끌고 왔다. 이 담요는 절대 안 뺏기는, 자기에게만은 안전 담요(security blanket)인데 그렇게 중요한 담요를 들고 온 것이다. 즉 이 아기들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낌으로 알고, 동시에 같은 감정을 느낀다(공감)는 것이다. 어떤 아기는 엄마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는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는데 자기 눈을 닦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현상들이 공감적 행동이고 공감적인 표현이다. 아기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의 느낌을 동시에 함께 느낄 줄 아는 것이다.
이 자연스러운 느낌, 공감 현상은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울음부터 터트리는 걸 보면, 바로 그때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공감 능력을 뇌구조 속에 뿌리 박고 태어난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느낌이 있으니 울음이 나오는 것이고 그것이 느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태어나자마자 엄마와 관계가 형성되면서 유아 초기부터 엄마와 함께 느끼는 공감이 시작된다. 아기가 느끼는 엄마와의 느낌의 일치 경험을 조율(?) (well attuned) 이라고 부르는데, 쉽게 얘기하면 『마음의 일치』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대개 8개월쯤이면, 이러한 조율의 경험이 반복되면서 아이는 서로의 공감 경험을 감지하고 공유하는 능력이 발달 되고, 평생 지속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기초가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1년쯤 지나면 유아들은 그러한 행복감, 불행감, 불안감, 당황스러운 감정이 자기 것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몫도 있다는 것, 자 타의 감정을 분별하게 되며, 이러한 감정의 발달은 부모의 양육 태도나 방법과 크게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관계할 때 부모 자신이 저 아이 가슴이 얼마나 기쁠까, 또는 얼마나 슬플까? 라는 느낌 표현을 하면, 아이들은 좀 더 공감력을 갖게 되고, 부모나 타인들이 반응하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공감 능력이 형성되고, 그 모습을 모방함으로써 공감 반응의 폭도 더욱 발달시킨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부모와 정서적으로 일치되는 경험의 축적, 더욱이 부모의 공감적 이해는 사랑의 감정과도 연결되고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면 이와 반대로 조율이 안 될 때(misattunement, 느낌의 일치 경험을 하지 못할 때) 의결과는 어떻게 될까? 즉 부모와 아이와 감정 조율이 잘 안될 때, 조율의 부재가 오래 지속될 때 어떤 결과가 나올까? Stern은 어머니들을 상대로 이러한 조율 부재 실험을 했다. 방법은 어머니들에게 의도적으로 아이들에게 반응을 지나치게 적게 해주거나 지나치게 많이 해주도록, 잘못된 조율이 일어나도록 반응하게 하였다. 부모가 정서적인 장면 - 기쁨, 즐거움, 눈물 슬픔, 포옹 욕구 - 에 계속 공감적 반응을 안 해줄 때, 아이는 감정표현을 안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느끼는 것조차 회피하려 하였다. 아이들은 즉시 절망적이고 힘들어하는 반응을 보이는 등 상당한 정서적 대가가 이어졌다. 이러한 아동기에서 경험하는 공감 조율의 결핍, 부재 경험에서 계속 거부당하고 묵살될 때(공감 실패) 아이는 친밀한 정서적 인간관계 측면이 상실돼 버리고, 그 결과는 엄청난 정서적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우울한 어머니와 그렇지 않은 어머니의 아기들을 비교할 때, 우울한 어머니의 아기는 화, 분노, 슬픔을 좀 더 표현할 줄 알았고, 주위 환경에 대한 즉각적인 눈치나 호기심, 관심을 덜 보였는데 이것은 곧 어머니들의 상태,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Stern의 연구 대상이었던 어떤 어머니는 아기의 활동 수준에 맞춰 무반응으로 일관한 결과 그 아기는 수동적인 아이가 되었다. Stern은 그런 아기는 “자기가 관심, 흥미 있는 것에 엄마도 관심, 흥미를 함께 느껴줬으면 하는 욕구는 있으나 기대대로 되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아예 시도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학습한다.” 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공감조율경험 결핍의 엄청난 대가는 수동적인 아이에서부터 잔인한 범죄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결과로 나타난다. 범죄자만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들의 어린 시절의 특징은 대개 이집 저집에 옮겨 다니며 자랐거나 고아원에서 성장했던 아이들로, 자라는 동안 정서적 무관심과 공감 조율의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시사하고 있었다. 정서적인 무관심은 공감력을 무디게 하는 반면, 잔인하고 가학적인 위협, 굴욕감, 인색한 감정 경험, 또는 학대, 등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어린이 성추행 범이나 강간 범, 가정폭력 범, 반 사회적 이상 성격자들은 공감력이 결여되어 있다(Alexithymia). 공감 능력이 없으면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더 범죄적인 거짓말을 하게 된다. “여자들은 실제로 강간 되길 바란다.”, “그녀는 피할 수도 있었다.”, “아이를 다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거 뿐이다.”, “이것은 애정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라고 말한다. 아이들을 신체적으로 학대하는 부모들도 “이것은 교육을 위해서 일 뿐이다.”라고 정당화 한다. 공감 없는 삶의 모습이다.
공감력의 파괴는 잔인한 행동을 하게 하는 주원인이 된다. 특히 정신병질자(Sociopath, Psychopath) 들은 잔인하고 참혹한 행위에서 조차 후회 없이 즐거워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들은 공감이나 연민을 느낄 수 없는, 혹은 최소한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거의 희망이 없는 것으로 간주 되고, 더 극단의 경우는 피해자들의 고통을 즐기기까지 하는 가학적 (sadistic) 살인자 같은 잔인한 정신 병질자들이다. 이들은 아마도 최소한의 정서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냉담, 잔인성으로 보아 어린 시절 심각한 정서적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신 병질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말도 기꺼이 하는 유창한 거짓말쟁이이다.
공감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된다. 심지어 뇌구조 속에 뿌리 박고 태어난다고 까지 신경학적 측면에서는 이야기한다. 그러나 후천적으로 잘 배양하고 양육되지 못하고 실패했을 때 그 엄청난 대가는 상상 이상임을 알게 되었다. 공감, 느낌은 중요하다. 공감은 감정 지능(EQ)의 핵심이다.
인간에게 최선으로 중요하게 꼽는다면 느낌, 그 이상 중요한 것은 거의 없는 거 같다. 느낌의 가장 가까운 말은 마음이니까. 자신의 느낌, 상대의 느낌, 타인의 느낌, 온 세상의 느낌을 돌보며 사는 것이 최우선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말 가지고는, 왜 아직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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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Daniel Goleman. Emotional Intelligence(1995) 를 참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