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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2-10 20:22
Narcissist Mother
 글쓴이 : 김연
조회 : 10,496  

48. Narcissist Mother

다음 글은 어느 한 내담자가 『과연 제가 엄마 마음에 들 날이 올까요?』 (원제: Will I ever be good enough?: healing the daughters of narcissistic mo. 캐릴 맥브라이드 저, 이현정 역) 라는 책을 읽고 느낀 감동이 있어 그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아마도 상담을 많이 받고, 치료되어서, 어머니와의 문제로부터 좀 벗어나 있거나, 어머니보다는 outgrown 되어서, 어느 정도 편안한 상태가 되었을 때 이 글들이 이해 될 거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 거 같아서, 책의 역자, 저자와 제목을 밝히고 여기에 올린다. 내용에서는 Narcissist Mother가 어떻게 딸(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해주고 있다. 미성숙한 엄마는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해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빼앗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는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딸들, 아들들, 어머니들, 아버지들 외에 모두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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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의 입장에서는 종종 자신에게 문제가 있고, 부족함이 있다고 느껴서 자책할 가능성이 많다. 심지어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수치스러워 할 수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주입받는 엄마의 논리와 비난의 틀 안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엄마와 딸의 관계는 가족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뿌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불행하게도 그 엄마의 엄마나 그 엄마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유전적인 것이든, 학습에 의한 것이든 다음 세대로 대물림될 위험은 너무나 크다. 

개인적 차이는 있겠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르시시스트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고, 나르시시스트가 변하기를 기다리는 대신 내가 그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이유다.

맥브라이드가 정리한 10가지 고통관계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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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엄마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지만 불가능하다. 애증을 반복한다.

아이는 엄마를 즐겁게 해서 사랑을 받아 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을 체험한다. 그러다가 반항하고 증오한다. 가출도 하지만 또다시 굴복한다. 나이가 들면서 엄마와의 인연을 끊으려고 한다. 그러다가 측은지심을 느껴 다시 찾고, 만나서 싸우고 또 헤어진다. 인정을 갈구하며 한편으론 증오한다. 

딸은 엄마가 제공하는 무조건적 사랑의 애착을 경험하지 못한다. 어린아이에게 나르시시스트 힘은 막강하다.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안전을 제공받고, 아이의 욕구를 해결해 주면 생존을 책임져주는 보호자나 양육자로서의 엄마를 경험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엄마를 찾았지만 냉정한 거절을 경험했고, 나의 절실한 욕구가 외면당하면서 생존의 위협을 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엄마의 파워가 막강하다는 것을 몸속 깊게 느낀다. 나를 보호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나의 안전에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가 엄마인 것이다. 

모든 상황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어야만 자신의 불안을 제거하면서 자신의 생존을 모색할 수 있는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어린아이에게 그 어떤 존재보다 위협적인 존재다. 아이에게 저항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런데 헷갈린다. 가끔 엄마는 진짜 엄마의 역할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예뻐 보이라고 예쁜 옷도 사주고, 공부 잘 하라고 학원도 보내주고, 맛있는 간식도 내 주기 때문이다. 엄마의 이러한 행동이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 엄마 자신의 욕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어린아이는 알지 못한다. 어떤 때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줄 것 같던 엄마가 다음날엔 분노로 가득차서 나를 쥐 잡듯이 대할 때면 정말 헷갈리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지속적으로 자식들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뭔가 끔찍한 일을 했다고 암시하기도 한다. 결국 아이들에게 인지적 부조화를 유발한다. 엄마는 나에게 분열된 존재로 다가오고, 나 또한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그 결과 아이들은 자신의 실제 자기를 믿지 못하게 된다. 


2. 가족은 엄마 중심으로 돌아간다.

엄마는 왕 아빠는 하인, 자녀는 주변인이다. 엄마는 통제 가능한 사람을 남편으로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아빠는 이미 자신의 주체적 삶을 포기하고 하인의 삶에 충실할 수도 있다. 간혹 엄마는 아빠의 권위를 세워주는 척하지만 결국은 아빠를 엄마가 조종한다. 아빠가 중간에 나서기도 하지만 최종 결정권은 엄마 자신에게 있음을 너무나 잘 안다. 

아빠의 자기 합리화는 주로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 참고 산다는 것이다. 자신이 옳고, 엄마가 그렇지 않지만, 남자로서, 더 큰 사람으로서 참고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수치심을 덮기 위한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아빠는 어쩌면 초기에 노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가 변하지 않으며, 결코 엄마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체득한 것이다.

딸이 아빠에게서 느끼는 배신감은 그래서 더 클 수 있다. 나 대신 엄마와 싸워주지 못해서 실망하고, 엄마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에서 절망한다. 그러나 딸의 입장에서 엄마의 나르시시스트적인 특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빠에 대한 감정이 왜 그리 복잡한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딸이 다른 이성을 만날 때도 무의식적인 동기로 작용할 수 있다. 엄마의 애착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남자를 찾다가도, 그에게서 아빠의 배신자적인 느낌을 받을 때는 그 남자에게 아빠를 투사해서 공격할 수도 있다. 


3. 엄마는 공감능력이 없다. 

공감능력이 없는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거나 감정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 아마도 자신의 감정이 수용되는 경험을 하기보다는 거절당하는 경험을 더 많이 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 할 수도 있다. 

엄마와의 공감을 경험하지 못한 결과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먹이고 씻기고 입히는 가장 원초적인 양육의 행동을 보면, 어색하기 그지없다. 수업시간에 실습하듯 한다. 엄마가 지니고 있는 본능적 감각에 의해 나오는 행동이 아니다. 아이를 돌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행복감을 느끼기가 어렵다. 맛있는 음식을 직접 해서 함께 나누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끼지 못 한다. 아주 어린 아이에게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있는 헛 똑똑한 엄마들을 볼 때면, 참으로 안타깝다. 


4. 엄마는 감정조절을 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아닌 일에 갑자기 분노를 쏟아내는 엄마를 경험하면서 아이들은 마치 지뢰 위를 걷는 느낌을 경험한다. 정작 아이들에게 중요한 일이 일어났을 때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기도 한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우선인지는 오직 엄마의 기준에 따를 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달라지는 기준에 아이들은 혼란스러울 뿐이다.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화를 냄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제거하고, 평온을 되찾는다. 엄마의 분노 가득한 ㅈㄹ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경향이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그 분노의 폭풍이 지나가면 엄마는 평안을 얻는다. 그러나 당하는 아이에게는 트라우마가 된다. 더 심각한 것은 반복이 거듭될수록 이 충격적인 사건이 일상적인 것으로 되고, 그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다는 것이다. 아이의 심신은 점점 병들어가고, 결국 쌓이고 쌓인 부정적 경험의 산물은 먼 훗날 큰 대가를 요구하며 기다리게 된다.

간혹, 화난 엄마는 침묵으로 딸을 벌주기도 한다. 이런 침묵은 아이들에게 죄책감을 안겨준다. 


5. 엄마는 비판적이다

상대를 평가하고, 판단하고 벌주는 것은 나르시시스트가 말로써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권력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말발이 세다. 자신의 취약한 내면을 외모나 언변으로 커버하는 것이다. 상대가 형편없다고 이런저런 모든 근거를 다 끌어대서 큰소리로 일방적으로 읊어대면, 성인도 그냥 당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어린 아이에게는 저항은커녕 변명의 여지도 없다. 아이는 ‘모든 것은 나의 잘못이며, 나의 존재는 가치가 없다’ 라고 여기게 된다. 결국 스스로 자존감을 바닥에 처박게 된다. 이렇게 엄마로부터 부정적인 메시지를 받는 정서적 학대를 당하면 자신은 무능력하다고 느끼며, 자기를 혐오하기도 하고, 만성적인 불안에 떨고 심지어 행복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6. 딸의 감정보다는 엄마의 감정이 중요하고 우선한다. 엄마의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 

집안에서 존중받아야 할 감정을 가진 오직 한 사람은, 나르시시스트 엄마뿐이다. 다른 가족 구성원들도 감정을 가진 인격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데,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쁜 옷을 입히고, 딸이 공부를 잘하는 것은 모두 다 엄마의 이미지를 위한 것이다. 엄마는 종종 딸을 위해 일한다고 강조한다. 딸의 삶이 엄마의 전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엄마는 알지 못한다. 관심이 없다. 엄마가 원하는 것이 딸을 위한 것이라고 매우 강하게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란 딸은 엄마와 적절한 분리를 거쳐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하지 못하고, 자존감이 매우 낮은 어른이 될 수도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7. 엄마가 딸을 질투한다.

딸이 잘 나가를 바라지만 결코 엄마를 능가해서는 안된다. 아빠와 잘 지내는 것 또한 쉽사리 용납될 수 없다. 모든 나르시시스트가 그렇듯이 ‘내가 제일 잘 나가’ 룰이 깨지면 불안을  내가 느낀다. 우위에 있는 것이 보장되는 한에서만, 타인이 잘 나갈 수 있다. 딸이 예쁘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보다는 조금 덜.

한 쪽에서 상대가 나보다 우위를 점하면, 그 분야가 아닌 다른 쪽에서 반드시 힘의 우위를 확보해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분명 하나는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돈이다. 자신의 결정권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최후의 무기는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르시시스트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아빠와 잘 지내는 딸의 경우, 어떨 때는 그것을 인정하기도 한다. 내가 못하는 부분을 아빠가 해주는 것에 감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그 질투가 표면으로 뛰쳐나온다.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나와서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힘의 우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결과적으로 딸이 받는 상처는 더 극적으로 배가 된다.


8. 딸의 건강한 자기표현을 거부한다.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는 엄마는 딸의 욕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딸의 선택권은 항상 엄마에게 귀속되어 있다. 집안에서 감정표현이 가능한 유일한 사람, 나르시시스트 엄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딸은 자기표현을 한다. 그러나 말을 잘하는 엄마, 때로는 목소리가 큰 엄마, 때로는 분노의 에너지로 가득 찬 엄마의 표정을 경험하면 딸은 점점 입을 닫게 된다. 자기표현을 주저하는 것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표현하는 방법만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기 때문에 엄마처럼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자신의 감정과 의사를 표현하지 않을수록 상처받는 일이 적어져서 자신이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는 본능적으로 안다. 결국 아이는 이러한 억압된 감정을 다른 방식으로 표출한다. 책에 파묻혀 살거나, 인터넷에 빠져들거나, 이것저것 먹거나, 자신의 몸에 생채기를 내는 것 등이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과 욕구는 반드시 다른 형태로 드러난다, 그것도 중독적인 행동으로.


9. 딸을 자녀로 대하지 않고, 친구로 대한다.

엄마는 자기 부모로부터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애착을 경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다. 심지어 나르시시스트 부모로부터 정서적 학대를 받았을 가능성이 더 많다. 부모로부터 받지 못했던 심리적, 정서적 욕구를 딸로부터 받기 위해 딸을 이용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그런 친구들을 찾았을 것이며, 그런 배우자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친구나 배우자가 꾸준히 남아 있기가 쉽지 않다. 그러는 와중에 자녀가 태어났다. 절대적 약자다. 절대적 힘의 우위를 지니고 있는 엄마는 이제 그 딸에게 내 엄마의 역할을, 배우자의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 친구 같은 딸을 원한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너희들을 키우는 것은 너희가 자라서 나를 위로해 주는 친구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직접 말  하기도 한다.

‘친구 같은 딸’이라 표현되는 이 무서운 동기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딸로부터 위로를 기대하는 엄마는 물론 그 위로를 받을 수도 없겠지만, 더 심각한 것은 딸이 양육을 받는 입장이 아니라, 양육자의 역할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역할을 하는 딸에게 “정말 기특하구나, 정말 어른스럽구나, 참 대견하다”라고 강화를 시켜주게 된다. 딸의 별명이 자칫 ‘엄마’가 되는 비극이 생길 수도 있다. 딸은 딸로 자라야 어른이 되어서 엄마가 될 수 있다. 엄마 역할로 자란 딸은 정작 엄마가 되면, 엄마의 역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10. 모녀지간에 경계나 프라이버시가 없다

딸을 자신의 소유물인양 생각한다. 엄마와 딸은 진정한 개별화 individuation 가 필요하다. 신체적으로 연결된 탯줄을 끊는 분리의 과정은 새로운 개별적 자아로 분리되는 심리적, 정신적, 인격적 개별화를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 엄마에게 아이들이란 엄마가 감독하는 영화 속의 배우다. 엄마 작가가 써놓은 시나리오대로, 엄마 감독이 지시하는 동선으로 연기를 해야 한다. 아이들은 그들의 고유한 개성과 인격으로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필요에 의해 배치될 뿐이다. 


11. 미친 엄마라는 설정이 인지부조화의 극심한 불편함을 가져와서 그냥 덤덤하게 나르시시스트 엄마와 딸들이라고 제목을 수정했는데, 어쩌면 제목을 다시 바꿔야 할지도 모를 글을 발견했다. Cyndi Lopez는 Psychcental에 쓴 글에서 나르시시스트 엄마에 대해 첫 문장에 이렇게 썼다. 


“지옥에는 나르시시스트 엄마들을 위한 특별한 장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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